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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첫사랑 수지, 건축학 개론, 기억의 습작과 추억

    "건축학 개론"이 재미 있으면 올드 세대?

     

    이 영화가 재미 있으면 케케묵은 세대가 되었다는 걸 알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슬프게도, 저는 건축학 개론이 너무 재미있었고, 지금 다시 봐도 또 재미 있고 눈물까지 고일 정도이니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 영화에서 눈을 뗄래야 뗄 수가 없었던 점은, 영화의 배우도, 명연기도 스토리 라인도 대사도 아니었어요.

     

    영화의 풀네임은 "건축학 개론-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시간" 이었는데요. 이 풀네임 속에 영화의 키포인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90년대 중반 즉 15년전 20년 전에 익히 보고 들었었던 모든 배경들, 물건들,  

    삐삐, 어딘가 보았음직한 동네, 골목, 독서실, 38번 버스, 전람회, 기억의 습작, CD 플레이어,  양평 구둔역, 옛날 버스, 헤어 무스, geuss 티셔츠까지.

    영화를 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때 그 시간의 기억을 계속 후비고 파고 드는 느낌이었던 거에요. 기억 한쪽 저편으로 물러나 있는 아련한 추억들, 사람들, 기억, 그때 그 당시 느끼고 감당해야 했던 시련, 고민들, 그리고 ...... 사랑도.

     

     

     

     

    건축학 개론은 그때 그 기억을 헤집고 드는 영화에요. 겉으로 보기만 해서는 정말 잔잔하고 심심한 영화같지만, 그때 그 당시에 풋풋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한테는 정말 유리창을 때리는 장맛비처럼 머리 한켠을 쾅쾅 울리는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90년대 그때의 추억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한텐 이 영화는 정말 재미 없고 지루했을 것같애요. 그냥, 수지랑 이제훈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어떤 화면 눈요깃감 정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인 건 그때문이라고 생각돼요.

     

    시간, 그리고 공간.

     

    영화는 그때 그 시간, 그때 그 장소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때 꼭 있었을 법한 재수생 친구가 나와서 향수를 돋우고, 그때 동네에 꼭 있었을 법한 친숙한 시장통이 나와서 당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다녔었던 길이 생각나고요. 

    그때 20대 초반, 너무나 심하게  앓아서 힘들어했던 첫사랑에 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좁은 방을 채우는 연기처럼 퍼져나가는 걸 느끼게 해요.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고, 차마 말은 못했던, 같은 동네에 살던 여학생을 뒤에서 쫓아가는 장면, 그러다 마주치게 된 재수생 친구, 친구가 다니는 동네 독서실,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한 모금 피워봤던 담배, 그러다.... 그 여학생과 말을 처음으로 섞었을 때의 그런 설레임,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어주면서 처음으로 스킨쉽을 하게 되는 순간, 가슴이 뛰어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그 장면,

     

     

     

     

    영화의 씬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20년전 언젠가의 시간과 장소를 계속 내 두 발로 걷고 있는 것같아 너무나 머릿속이 저며드는 느낌이 들게 돼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순간, 그때를 아름답고 차분한 영상으로 담아낸 영화. 건축학 개론은 갓 스무살 때를 어찌나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지요.

     

    90년대를 대학에서 보낸 사람들은,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요. 그때 그 좋아하던 아이와 같이 말을 나누던 시간과 공간, 이젠 아련한 추억 속에서 마치 오래된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처럼 쳐박혀 있었는데, 그걸 하나하나 꺼내서 쳐다보는 느낌인 거에요.

     

    이 영화가 던지는 아주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건,  

    지금 나에게, 현실에 찌들 대로 찌들고, 나이든 승민이 얘기했듯 월세에 생활비에 빠듯하게 하루하루를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때 그 순수하고 꿈 많던 시절의 추억, 그리고 첫사랑, 그건 무엇인걸까? 라는 거에요.

     

     

     

    습작으로 지나가게 되는 인생

     

    생각해봤어요. 영화 제목이 왜 건축학 개론일까. 기억의 습작은 왜 나왔을까?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과 과거의 순수함을 떠올리면서도 결국은 힘들지만 다시 현실의 무게를 지탱하고 단단하게 살아나가고자 애쓰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들 모두를 상징하고 있는 거겠죠. 인생은, 언제까지지고 개론이고 습작일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삶은, 구체적인 플랜이나 정확한 설계도면을 들여다보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마치 건축학 개론처럼, 그저 이렇게 해야 한다. 하는 추상적이고 개론적인 방향성만 갖고 늘 실수하면서 틀리면서, 오해하면서,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고백할 시기도 놓치고 상처주고, 그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와 버리고, 그러면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채로 살아가게 되는거죠.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서연은 급격히 몸이 쇠약해진 아빠한테 얘기해요.

    "나 이제 피아노 안 쳐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요.

    옛날 순수하고 꿈과 동경이 넘치던 시절로부터 너무 먼 길을 걸어 온거죠.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꿈,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된 시간, 놓쳐버린 첫사랑,

    15년 전 승민이 만들었던 서연의 집 미니어쳐, 그걸 보고 놀라서, 나한테 왜 다시 온 거냐고 따지는 승민에게 서연이 소리 지르는 대사에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맞게 되어요. "그래, 지금껏 갖고 있었어. 내가 이거 갖고 있으면 안돼? 나는 니가,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첫사랑의 추억 한 토막. 그리고 영화 하나.

     

    이 영화는 사람을 아주 행복하고 흐뭇하게 만들지는 않아요. 옛날 일 떠올린다고 꼭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떠올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첫사랑의 한 토막 추억마저도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행한 것일까요?

     

    그게 건축학 개론이었어요. 습작같은 인생의, 풋냄새 나는 젊은 시절의 실패한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 그 기억의 한 토막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지네요. 역시 이젠 너무 '노땅'세대가 되어버린 탓일까요? ㅎㅎ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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