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Content

    티스토리 뷰

    영화 남한 산성.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 즉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주 힘겨운 외교 정책을 펴야 하는 상황이 과거 명과 후금 사이에서 미묘한 정책 조율을 해야 했던 때와 오버랩되는 면이 있어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시사성이 있다는 생각에 몰입하게 됐습니다. 

     

    제가 역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오늘은 영화 남한산성을 한번 포스팅해보고자 합니다. 김영준 강사님의 유튜브 강의를 많이 참조했구요. 역사를 들여다 보면서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생각지 않고 현재를 기준으로 당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겁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내내 암이 돋게 만드는 부분을 몇 가지로 한번 정리해 볼까요?  이런 의문들은, 과연 사실이었을까요?

     

    첫째. 정묘호란을 겪은 후 10년동안 뭘 했기에 6일만에 도성을 함락당하고 왕이 피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당시 지배층은 준비도 없이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가?  그리고, 치졸하게 무슨 조그만 산성에 피신했을까?  그동안 백성은 그럼 다 죽으라는 건지.....

     

    둘째,  광해군때 등거리 외교를 펼쳐서 그때는 잘 넘겼다고 들었는데, 인조때는 왜 청을 등져서 전쟁을 맞고, 실력도 없으면서 강한 상대하고 자꾸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벌이자고 하는 건가? 척화파는 무뇌충들이 아니고 뭔가?

     

    셋째. 김상헌 최명길 빼고 나머지는 왜 저렇게 싹 다 무능하고 비합리적인 인간들인가?

     

    넷째. 조선군은 왜 저렇게 싸움을 못하나?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저렇게 굶주림과 추위에 방치돼 있는데 어떻게 싸움에 불쌍한 백성을 저모냥으로 몰아넣을 수 있나?

     
    다섯째. 청나라 황제 코앞에서, 포위된 마당에 명나라 황제를 향해서 제례를 올리다니 미친거 아닌가?

     


    하나하나 짚어볼께요.

     

    첫째. 조선 지도층은 명과 사이가 안 좋은 후금이, 배후의 근심을 없애기 위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는 걸 아주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팩트는, 그들 나름대로 대비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고속도로 하이패스 통과하듯 일주일도 안 돼서 의주~한양 약 430킬로라는 거리를 무주공산처럼 돌파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의 '작계' (침공에 대비한 수비 작전 계획) 때문입니다.

    고구려때 수 양제 30만 대군 몰살, 고려때 강감찬의 귀주 대첩을 예로 들까요. 대륙에서 침공을 받을 경우 한반도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다 산성으로 물자 갖고 들어가서 농성, 적의 보급이 끊어지길 기다리는 작전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어요.

     

    대륙에서 침공하는 적 정예군하고 정면 충돌을 해서 이긴 적이 없었던 거에요. 따라서 농성이 당시의 '작계'가 된 거에요. 물자, 식량을 구할 길이 없으면 보급이 끊긴 적은 물러날 수밖에 없고 그때 산성을 열고 나와서 배후를 치는 것,  정묘호란때도 사실상 그랬어요.  그게 조선의 '작계'였으니 청군이 빈 도로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근데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치는 조선이 또 그럴 꺼란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굉장히 모험적인 작전을 하달하게 됩니다. 농성하는 적들 신경쓰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한양까지 앞만 보고 달리라는 거였죠.

    병자년 전쟁 발발 날짜는 왜 12월이었을까?  무지하게 추울 때였으니 압록강, 청천강, 임진강 할 것없이 죄다 얼어붙습니다. 얼음판 위로, 기마병이 도강을 쉽게 하여 한양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 시기를 선택한 거죠. 왕만 잡으면 어차피 전쟁은 끝이니까...

     

     

    마치 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해 종심으로 진격했던 하인츠 구데리안의 전격전과 비슷하다 하겠는데 오로지 기동력만으로 초전에 승전을 낚겠다는, 한 마디로 '뒤가 없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어요.


    만약 청군이 왕을 놓쳐서 인조가 피신에 성공한다면? 이후 의주에서 한양에 이르기까지 지나친 수많은 산성, 요새들에서 건재한 병력들이 보급로를 끊어 만약 홍타이치의 주 병력이 포위당한다면? 그 추운 겨울에 조선 들판에 먹을 게 있을 턱도 없고 청군은 굶어죽는 식으로 자칫하면 끝장인 위험한 상황이었죠.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강화도에 먼저 입성하고 왕이 강화도로 향할 채비를 하는 딱 그 다음날에 청의 선봉대가 한양 서북 근교에 도착합니다. 하루 차이로 인조가 강화도에 들어가는 길을 막은 거죠.

    솔직히 이때 벌써 이 싸움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작계'의 허를 찔린 것이니까...

     

    헌데 조선군엔 Plan B가 있었어요. 그건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인데,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면 백성들은 세자와 함께 거기 들어가서 농성하라고 만들어놨던 장소였고 미리 전쟁 물자를 충분히 비축해 놨었어요. 절대 당시 무관들이 무식하거나 무뇌충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험한 산 위에 만들어놓은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버티면, 의주에는 임경업이 지키고 있으니 청군이 뒤가 끊겨서 고생하는 새에 도원수 김자점이 근왕병을 모집해서 올라오면 적군을 포위 공격, 섬멸이 가능했던 거니까요.

    진짜 작계 대로만 됐으면 병자년 전쟁은 조선이 절대로 질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역사의 장난이랄까. 하필 남한산성에 들일 전투 식량을 산밑 창고에 보관해 놨었는데 그걸 성으로 옮기기 직전에, 너무 빨리 한양에 나타난 청군이 그걸 점거해서 차지해 버린 거에요. 게다가 도원수 김자점은 우유부단하고 자기 할 일이 뭔질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결국 그래서 남한산성은 식량 부족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겁니다. 즉 병자년 전쟁은 자칫하면 청군이 괴멸당할 수도 있었던 굉장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전략을 채택한 싸움인데, 이상하게 하늘이 청나라 편이었던 건지 한끝차이로 모든 게 맞아떨어져 가서 저 모냥이 됐던 겁니다. 진짜로 인조 정권의 운이 없었어요.

     

    둘째, 광해는 외교를 등거리로 잘해서 전쟁을 피했는데, 인조는 명에 사대하느라 청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세간의 상식도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학자들은 인조 초반도 중립 외교로 보고 있어요.


    당시도 상식이 없는 세상은 아니었죠. 후금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요. 영화에 나온 주전파들도 덮어놓고 후금과 전쟁을 벌이자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을지 짐작할 수 있어요. 싸드 문제를 겹쳐서 생각해 봐도 그렇죠.

    미국이 기를 쓰고 그걸 갖다 놓겠다고 하는데, 중국은 죽어라 그걸 싫어하고, 한국은 싸드를 들이느냐, 안 들이느냐, 딱 그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인가요.  

     

    가까이 있는 중국한테 보복을 당할 게 뻔히 눈에 보이는데 티나게 미국쪽으로 기울게끔 외교를 할 것이냐, 그렇다고 한국 전쟁때 갖은 피해를 보면서 남한 정부가 보존되도록 했던 미국을 무시하고 요즘 중국이 쎄다고 해서 중국쪽으로 기울 것이냐, 이건 경제 논리만 갖고 판단할 수도 없고, 사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줄타기를 한다 싶을 정도로 무섭고도 어려운 문제에요. 

     

    그런데 후금과 명 사이에 끼어 있다시피 한 17세기 초 조선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죠. 인조가 아닌 그 어떤 왕이 집권해 있었다 한들 결정은 어려웠을 껍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때 30만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해서 도와줬던 명을 지금 와서 청이 잘나간다고 싹 무시하고 모른척한다? 돌이켜보면 명은 그때 조선에 파병해서 싸워주느라 국가 재정이 파탄나서 솔직히 그 때문에 망했거든요.

     

    그것까지 생각하면 주전파들이 꼭 막힌 사람들이라고만 할 순 없어요.

     

    셋째 왜 이렇게 사람들이 갈려서 싸움만 하고 다 무능하냐. (특히 영의정 김류랑 도원수 김자점 등...)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속으로 생각했어요.

    김훈 작가가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집필한 이유는 뭐였을까.

     

     

     

     

    올해 7월에 개정판이 나온 것은 시기가 참 절묘합니다. 즉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역사에 거울처럼 비춰서 보여주고 있거든요. 지금은 17세기 조선과 공교롭게도 너무 비슷해요.  외교적, 안보적으로 국방 문제는 심각하게 악화되고 경제는 계속 어려워지며 그 와중에 정치 집단은 남한산성 내의 주화파 주전파처럼 갈려서 신나게 패싸움하고 있거든요.

     

    적군에게 포위된 성 안에서 맨날 상소 올리고 누굴 처벌해라 누구 머리를 쳐라 이렇게 반대파를 척결하려는데 여념이 없어보이는 당시 지도층을 보면 아 되게 한심하네 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의미에선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질 않습니다. 

     

    인조 정부는 반정으로 집권한 권력입니다.  집권하자마자 이괄의 쿠데타도 이미 겪었고, 그런 와중에 정부를 꾸려가니 사실 행정 체계가 흔들려 뒤숭숭한 가운데 세계 최강의 육군 부대로부터 침공을 받았어요. 

     

    과연 그들의 무책임함과 몰염치성, 무능력함때문에 패전했다고, 그렇게만 평가해야 할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인조는 김류의 모함을 받은 수어사 이시백에게 곤장을 때리고 그 휘하의 군관을 처형하죠.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혀를 차는 장면이지만,  올해 집권한 행정부는 내각을 꾸리는 데 국회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아 5개월을 헤멨고 지금은 갈수록 더 심각한 정치적 갈등 속에 있는 걸 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넷째,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전투에서 패전만 했는가. 그렇질 않았다고 해요.


    제일 영화에서 황당한 건 홍이포의 살상력인데요. 실제 그 정도의 대구경 포를 청군이 공성전에 사용했던 건 맞는데,  그게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화력은 아니었대요. 때는 1600년대 초반이었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살벌하고도 정확한 포격 화력은 20세기 1차 세계대전쯤 돼야 나올 수 있었던 수준으로 보이구요... 

     

    그리고 조선군도 홍이포만한 대구경 포를 갖고 있었어요. 당연히 응전을 했고, 포병의 화력과 정확도 등만 놓고 볼 때는 조선군이 더 많은 적을 살상했다고 합니다. 청나라군은 기병이라서, 포격에 서툴러서 오폭과 사고가 굉장히 많았다고 하고요.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는, 어떻게 힘없는 백성을 저토록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최명길 김상헌이 얘기했듯이 홍타이치의 군대도 역시 추위 속에서 떨고 수없이 동상들을 걸리고 있었을 껍니다. 


    지금 군대처럼 방한복 지급되고 깔깔이에 두꺼운 양말 주머니 난로 그런 게 지급되던 시절이 아니었어요.  유럽이든 아메리카든 아시아든 저런 식으로 싸우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어쨌든 이때의 전쟁은 청나라로서도 되게 무리한 전술이었고 작은 전투에서는 조선군에게 패전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산지가 많은 조선땅 깊숙히 들어와서 싸움을 오래 끄는 동안 만약 명군에게 후방을 공격당하면 자기 나라 자체가 결딴날 상황이었으니 굉장히 마음이 급했을 꺼에요.


    영화에선 청 황제의 태도를 되게 여유있게 그려놨지만 조선과의 전쟁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고, 절대로 그들로서도 여유 부릴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식량도 그리 풍족하지 않았구요.

     

    다섯째. 정월 초하루에 그 지경에 처한 조선 왕이 명 황제에게 제례 드리면서 홍타이치를 짜증나게 만드는 장면.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참 혀를 차는 것같드라고요. 뭐하러 저런 걸 할까. 주권 국가의 수장이, 멀리 있는 명나라 황제가 뭐라고 시녀처럼 북경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걸까?

     

    근데 모든 일엔 다 그 이유가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 무개념 무뇌충 아니었어요. 조선 왕조 자체의 태생이 쿠데타 정권이거든요. 왕조의 기틀을 갖춘 태종같은 사람은 아예 자기 형제들을 백정처럼 죽이고 왕관을 쓴 사람이고.....  왕조 내내 거의 모든 왕들은 역모, 난리에 노이로제가 걸려 보였고 그때문에 사화도 자꾸 일어나고 피바람이 잠잠하질 않았어요.


    조선 왕조 자체의 태생적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무력으로 반대 세력을 억누르면 될 것같지만 절대 창과 칼만으론 정권을 안정시킬 수 없거든요. 당시 세계 최강국 대명제국으로부터 공인, 인증을 받은 왕이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쿠데타? 큰일 날꺼다. 이런 일종의 인증서 개념이 있었던 거고 반정 정권인 인조한테는 더더욱 그랫을 꺼에요.


    그렇게 200년 가까이 지내 왔는데 이런 와중에 명이 비실비실해지고 새로운 강자가 바로 압록강 건너에 탄생하고 있었어요. 그럼 대체 조선은 어떻게 해야 맞았던 걸까요?

     

     

    대한민국의 출발 역시도 상해 임시 정부를 계승했다고 보기 어렵거든요. 김구 선생은 석연치 않게 암살당했고, 여기에 세워진 권력집단은 광복을 일궈낸 세력이 아니었고 미군 군정 하에 친일 청산도 사실상 안 된 상태로 빠르게 부패했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태생적으로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해결되지 못하고 지나온 그 모든 문제들이 지금 북핵과 함께 재생산되고 있어요. 전술핵을 배치해야 한다느니 자체 핵을 개발해야 된다느니 빗발치듯 말은 많지만, 대체 우리나라가 지금 어떻게 해야 정답인지 기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쳥과 명 사이에 호두처럼 끼워 있던 당신 인조 정권 역시 어떤 게 정답이었는지 판단하지 못한 채, 포위된 성곽 안에서 모진 갑론 을박만 계속하고 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좀 무거워요. 보는 내내 유쾌한 장면이 없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쾌하지 못했던 시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364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것은 김훈 작가의 능력과 감독의 연출력, 중량감 있는 배우들의 연기력 등을 높이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적, 역사적 고증에서 많이 벗어나 보이는 부분들이 눈에 거슬리고, (대표적으로 김상헌은 할복 자살을 한 적이 없죠. 전쟁 이후에도 오래 살았습니다.)  인조 정권의 무능력함 및 청군의 실력이 과장되어 연출된 부분은 옥에 티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1636년의 저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더 깊이 통찰할 수 있을테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아 그리고 대장장이 서날쇠는 실존 인물이더라고요. 영화에서는 도원수에게 팽 당해 도망 나오고, 종전 후 계속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대부의 지위까지 받고 자손들까지 국가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도원수 김자점은 격문을 받은 후 그걸 없앨려고 한 게 아니라 답장을 써서 성 안으로 들여보냈던 것이 팩트라고 합니다.

     

     

     

    Comments